회사를 그만두었을 적, 그 때는 사실 두려움 걱정도 없었다. 미래라는 것을 깊이 생각지도 않았고, 또 자신도 있었고. 뭐든 하면 안될 것이 없던 '잘나가던 시절'이 나도 있었는데... 그 때가 그 때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뉴욕엘 갔다. 처음엔 아주 살 요량이었다. 출장도 피하고픈 뉴욕. 아주아주 싫었던 뉴욕이었지만 누군가가 '니가 만약 패션을 하고 광고를 하고 싶다면 (앞으로), 그럼 뉴욕으로 가라' 란 말을 듣고는 전격 결정.
여유란 것도 처음, 새로움에 적셔진 것도 참 오랫만이었던 것 같다. 뉴욕이란 내겐 항상 '원위크시티'였었는데 말이다. 도착해서는 바로 미팅 다음날 로케이션 헌팅, 미팅, 준비, 촬영, 밀착확인, 귀국. 이렇게가 딱 일주일치 출장일정이다.
근데 살면서 느낀 '뉴욕'이란 '도전하고픈, 정말 멋진' 도시.
매일매일이 새롭고 즐겁고, 또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 때 만난 친구들도 참 멋진 친구들. John, Susan을 만나고 또 민호와 본을 만났다.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내게 일할 기회를 주었던 곳은 'North6'라고 뉴욕 최고의 프로덕션이었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기엔 현실은 차가웠다. 회사는 내게 뉴욕이 아닌 서울로 돌아가서 커미션 베이스의 계약직으로만 일하자고 했다. 그래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 친구의 사무실에 책상하나를 두고 시작하였던 것이 3년전이다.
(제로 이어)
north6 seoul 의 대표라는 직함을 얻었지만, 촬영이 없으면 난 돈을 못받는다. 그리고 한국의 촬영은 뉴욕의 north6가 원하는 그런촬영이 아니었다. North6는 그 들이 했던 Gucci, Prada, GAP 정도의 스케일로 된 아시아 최고의 촬영을 원했다. 서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 때 서울은 10년전의 촬영비로 어떻게든 '남겨야'하는 궁색하기 짝이 없는 변방촬영을 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마 앞으로도 죽 그럴것이다.) 1년동안 나는 촬영을 한 번도 못했다. That means 나는 돈을 한 푼도 못벌었다.
(퍼스트 이어)
그리고 다음해에 난 north6와의 계약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불러줄 생각도 또 가고픈 의욕도 없었기에)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늘 하던 대행사. 패션광고대행사. 그것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 때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사람은 나와 동업이라는 형태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가 9월이었고 그 회사는 12월에 공식적으로 깨졌다. 그 사람은 우리회사의 직원을 두들겨 패 회사의 직원들이 모두 일을 할 수 없게 풍비박산을 내버렸다. 그리고는 아주아주 더티하고 개같이 끝내버렸다. 투자했던 통장을 가져가 버리고, 보증금을 가로챘으며, 회사를 아주 통째로 먹어버렸다. 난 정말 바보였다. 젠틀하고 선비처럼 지식있는 교양인으로 처리하면 될 것 이라는 생각은 마치 내게 "야 이 등신새끼야' 라는 커다란 망치로 나를 몇년간 내리쳤다.
난 깨끗하게 망해버렸다. 투자한 돈은 모두 날렸다. 뺏겼다. 컴퓨터 2대가 전부였다. 그 때 알았다. 세상엔 인간이 아닌 인간의 탈을 쓴 개도 있다. 말로만 듣던 그 개에게 물어 뜯긴 상처는 나를 평생 변하게 했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은 거의 남아있질 않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오히려 나를 욕하고 죄인취급했다. 그 '개'의 모략은 정말 하루아침에 나를 저 밑바닥 똥구정물로 나를 쳐박았다.
아마 그 사람은 내가 더이상 재기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거다. 아마 그 심정으로 그 지경으로 나를 쳐박았을 것이다.
죽어버릴까? 이 패배감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몇날을 두고 고민했다. 세상이 무섭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나를 한순간에 떠나버린 그 모든 사람들이 죽도록 미웠고...
(세컨 이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웠주었던 사람이 셋이 있다. 나의 대부님과 내 친구 도윤이, 그리고 행크다.
도윤이는 다시 나에게 아무 조건없이 사무실 한 켠을 내어주었다. 대부님은 내 편에 서주셨다. 그리고 행크는 유일하게 나와 함께 있어 주었던 사람이었다.
뭐 논리적으로 상황따지고 이유따지고 조건따지고 해서 그 사람들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내 곁에 있었다 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확실한 것은 그 세사람이 내 곁에 있었다. 그게 중요하다.
책상 두개 컴퓨터 2대, 책 몇권. 지금 생각하면 진짜 정말로 비참하디 비참했다. 매일이 고통이었다. 행크는 사실 속을 많이 썪였고, 도윤이를 볼 낯도 없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MNLP는. 그리고 사라가 와주었고, 소영이가 와주었다.
내 두번째 해는 비참하게 시작되었지만 이들 셋은 내게 실낯같은 희망이랄까 뭔가 함께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해주었다.
행운과 불운이 교차했다. 돈은 없었고, 내 적금모두와 대출을 다시 받고 다시 메꾸고 또 대출을 받고 하는 싸이클이 한 해 내내 계속되었다.
그리고 두 번의 메뚜기시기를 거쳐 드디어 우리의 번듯한 사무실이 차려졌다. 나 사실 그 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줄줄난다. 비닐을 쳐놓고 공사판에 일하던 그 시절. 소영과 사라다와 행크 모두 함께 비닐치고 먼지먹고 밤새고. 아마도 내 평생은 이 들을 생각하며 이들에게 빚을 갚아야 하는 날일 것이다.
(써드 이어)
그게 바로 떠나 보내야 하는 올해인데... 09년이 시작되며 이렇게 빌었던 게 생각난다. '제발 올해만 그렇게 가라. 아무 사고 없이 그렇게 가자.' 올해까지만 어떻게 잘 넘기면 왠지 잘 될 것 같은 그런 예감? 그래서 그렇게 평이하게 보내야 할 것 같은 그런 생각들?
행복했다.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랑했던 사람. 그 사람이 있었다. 09년은. 무언가... 내 인생... 그리 별볼일 없었지만, 이 사람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노력하고 싶다 라는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열심히 노력하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바라면 나도 어쩌면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그런 마음도 살짝 들었던 것 같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우리 mnlp 식구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일을 맡겨준 광고주들에게도 너무 감사하고. 그래 맞다. 참 감사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알게 해준 한 행 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올해만 넘기자 넘기자 하는 마음. 그게 그렇게 소극적이었을까? 하느님을 믿는 내가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니었었나? 우리 아버지는 또다시 쓰러지셨고, 내 동생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무거운 짐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떠났다. 어떻게 넘기자고 했던 올해 역시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크게 한 방 먹이고 간다.
견디기 힘들다. 솔직히. 뭐 낙이랄까 하는 그런 희망따위도 없다. 그냥 하루하루가 즐거운 일도 서러운 일도 없는 모노톤의 흑백테레비가 되어버렸다고 할까?
그게 2009년이다. 나의 라스트 써드 이어.
이런 내 삼년은 '삼재'였다.
이미 난 첫번째 해에 알고 있었지만, 두번째 해를 거치며 세번째 해에서 확실히 '삼재'긴 '삼재'구나 하는 생각. (어쩔 수 없이 나는 신심이 부족한 것일까?)
희망도 기쁨도 사는 낙도 없어져 버린 2009년을 보낸다. 삼재를 보내고 힘들었던 삼년을 보낸다.
즐거웠던 추억이랑 행복했던 기억이랑 눈물났던 감동은 여기 내 가슴에 인그레이브되어있다.
파내고 싶은 아픔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조각되어 있다.
2009년은 이렇게 가지만, 삼재는 이렇게 가지만 그동안의 상처들은 다 남아있는 것인가?
아마도 이런 질문?
"진승찬에게... 삼재란?"
굿바이 삼년! 그동안 흥미로왔어. 제발 다시 올지 말아줘!
송구영신 앤 해피뉴이어
경인년 음력 정월 초하루, 삼재를 정리하며.